본문 바로가기
습관 만들기/컨셉진스쿨 100일 글쓰기

보리차

by miss.monster 2021. 1. 13.

2021.01.13.44일차(D-56)

 

갑자기 허리가 아파온다. 이 것은 둘 중 하나의 신호다. 배란통이거나 비(눈)가 오거나.

날짜 상으로 배란통은 아닌 것 같고, 눈이 오려나

 

나 : 허리가 왜 이렇게 아프지. 신랑, 혹시 내일 눈 온데??

신랑 : (휴대폰의 날씨 앱을 보며) 아니, 금요일쯤에나 오는 것 같은데

 

다음 날, 영어공부를 하다 쉬는 시간에 인스타그램 앱을 연다.

여기저기 눈 내리는 사진이 가득하다.

커튼을 열어보니, 눈이 펑펑 내리고 있다.


 

"역시........... 오는구나."

 

몸이라는 게 참, 이렇게도 정확하다니 왠지 모르게 뿌듯하다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몸으로 알게 되는 세상의 이치(?)가 점점 많아진다는 게 씁쓸하기도 하다.

 

커튼을 열었더니 찬 기운이 훅 느껴져, 온기가 느끼고 싶어 진다.

사은품으로 받은 나한과가 보인다. 차로 끓여먹으라고 했는데,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몰라 한 참 놔두었다.

나한과를 부셔, 다시팩용 팩에 담는다. 

어머님이 물 끓여먹으라고 주신 낡은 스테인리스 주전자와 직접 말려주신 옥수수수염과 낱알들을 찾아 꺼낸다.

주전자 뚜껑 손잡이 부분에 음표 그림이 새겨져 있는데, 물이 끓어오르면 마치 노래 같은 소리가 난다.

마치 마녀가 수프를 끓이듯 손으로 각 재료마다 적당한 양을 짚어 주전자에 넣는다. 주전자에 물을 가득 담아 불을 올린다.

 

'맛있어져라. 맛있어져라.' 주문처럼 속으로 말해본다.

 

집 안에 구수한 향과 따스한 온기가 퍼진다. 

생각해보니, 우리 집은 늘 물을 끌여 먹었다. 요즘은 레트로의 상징인 '델몬트 오렌지 주스' 유리병 가득 담아 냉장고에 줄을 지어 넣어두셨다. 물이 떨어질 새면, 할머니와 엄마는 이것저것 넣어 물을 끓였다. 집집마다 넣는 재료와 비율이 다르기에 끓인 물 맛이 달랐다. 어떤 친구네 집의 물은 색깔도 더 진했고, 맛도 썼다. 아무래도 나는 우리 집 물 맛이 가장 익숙하고 좋았다. 결혼 후 초반에는 생수를 사 먹었다. 보리차가 그리워, 물을 끓였는데 이상하게 그 맛이 나지 않아 몇 번 끓이다 그만두었다.

 

물 끓이는 게 뭐 별거 있을까 싶었는데... 나는 왜 그 맛이 나지 않을까?

 

결혼하고, 그런 것들이 많아졌다. 

짜파게티 물의 양이 맞지 않을 때, 생선 손질을 할 때, 떨어진 단추를 꿰맬 때, 줄어버린 옷소매를 볼 때, 청소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생긴 욕실의 물 때를 볼 때...

집 안 여기저기에서 엄마랑 할머니가 튀어나온다. 

당연한 것들은 전혀 당연하지 않았다.

 

 

우리 할머니, 짜파게티 물 양 하나만큼은 기가 막혔지.

할머니가 구운 김은 늘 친구들에게 인기가 좋았지.

이 꿈틀거리는 생선을, 내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엄마는 얼마나 자주 손질했을까.

어머님은 옥수수수염과 낱알을 일일이 씻어 볕 좋은 날, 말리셨겠지.

 

누군가의 티 나지 않은 부지런함 덕분에 나는 늘 쉽게 좋은 것만을 취했다.

엄마는, 할머니는, 어머님은 이게 뭐 대수로운 일이냐며 생색조차 내지 않는다.

그저 늘 본인이 당연히 하는 것들이기에.

 

이제 알겠다. 그 부지런함의 원동력을. 

 

반찬 하나 만드는데, 인터넷을 몇 번을 검색하고 몇 시간이 걸리고

싱크대 한 가득 설거지 거리가 나온다. 심지어 생각했던 맛이 아닐 때도 있다.

 

신랑은 내가 해주는 밥을 먹을 때 항상 '맛있다.'라고 한다.

짭짤할 때는 "완전 밥도둑인데?! 밥이랑 간이 딱 맞아."

싱거울 때는 "너무 짜게 먹으면 몸에 안 좋아. 슴슴하니 자극적이지 않아 좋은데?!"

탔을 때는 "좀 타야 고소하지~'

늘 남기는 거 없이 싹싹 비운다.

 

맛있게 먹는 모습, 맛있다고 해주는 말에

나는 기꺼이 부지런해지고 번거로워질 수 있을 것 같다.

 

엄마도, 할머니도, 어머님도 그랬겠지.

 

잠시 후, 주전자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어떤 맛이 날지, 조심스럽게 컵에 따른다.

구수하면서 달큰하다. 어릴 때, 할머니가 타주던 설탕물이 생각났다.

배가 아프다고 하면, 따뜻한 물에 설탕을 타주시곤 했는데...

 

 

 

 

 

 

 

 

 

 공감과 댓글은 사랑입니다 

 

* 블로그의 모든 사진, 글, 그림에 대한 허락 없는  캡처, 복사, 도용, 모방 모든 것을 금지합니다. 

*최대한 솔직하게 작성하였으나, 개인차가 있을 수 있음을 참고 바랍니다.

CopyRight 2021. missmonster all right reserved.

반응형

'습관 만들기 > 컨셉진스쿨 100일 글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녀  (0) 2021.01.15
밤의 발견  (0) 2021.01.14
Manners maketh man.  (0) 2021.01.12
월요일 휴무  (0) 2021.01.11
망원동  (0) 2021.01.1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