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25.87일 차(D-13)
책을 읽는 게 좋다. 정확히 말하면 소리 내서 읽는 게 좋다.
소리 내서 읽으면, 책을 정성스럽게 한 글자, 여백을 꼭꼭 씹어먹는 기분이다.
음식에 집중하면서 먹는 것을 'mindful eating'이라고 하는데 일종의, 'mindful reading'이랄까?!
낭독봉사를 하면서 재미를 붙이고 있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잠정적으로 중단하게 되면서 아쉬움이 컸다.
최근에 문학동네에서 하는 '문학동네방송반'활동을 알게 되었다. 그 달에 문학동네에서 지정해주는 책을 1분정도 낭독해서 SNS에 영상을 올리는 것이다. 신청만 하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이번 달 지정도서는 에밀 아자르가 쓴 '자기앞의 생'이다.
KBS 2TV 북유럽이라는 프로그램에도 소개되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영화는 넷플릭스에서도 볼 수 있다.
긴 소개보다 낭독영상을 만들었던 문장과 그때의 느낌을 적어보겠다.
카페, 디저트, 책. 오랜만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동시에 가능해졌다.
언제 또 불가능해질지 몰라, 마음껏 누렸다. (비록 1시간이지만)
이 책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고민했다. 구구절절하고 궁색한 나의 소개 대신 책 끝에 조경란 작가님의 글을 꼭 읽어보길 말하고 싶다.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로맹 가리
슬픈 결말로도 사람들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조경란
“하밀 할아버지”
내가 이렇게 할아버지를 부른 것은 그를 사랑하고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직 있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그런 이름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기 위해서였다.
이 소설은 로맹 가리가 에밀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는 점에서 ‘이름’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불린다. 혹은 누군가를 부른다. 이름, 별명, 직함, 역할 등 부르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런데 이름은 그중에서도 특별한 느낌이다. 인형 기계에서 마음에 드는 인형을 집듯, 나를 콕 집어 주는 것 같다. 나에게 붙은 치장을 떼어내고 오롯하게 나인 듯하다.
SNS에서도 이름이 필요하다. 이 세계에서 이름은 계정일 것이다. 보통 이름은 나의 선택과 상관없이 이미 주어진 것이지만, 계정은 내가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필요에 따라 여러 계정을 만들기도 한다. 이 곳에서는 이 이름, 저 곳에서는 저 이름. 그 때 그 때 불리고 싶은 이름을 정한다. 사업을 하거나 인플루언서들은 사업, 공식용/개인, 비공 식용으로 나눌 테고 개인들도 공부/취미/사진 등 활동에 따라 달리 쓴다. 나도 여러 계정을 두고 있다. 공부/ 글과 그림/ 일상을 나누고 이름도 조금씩 다르다. 재테크의 기본이 '통장 쪼개기'라고 하던데, 나한테는 이와 비슷한 의미이다. 월급/ 투자/ 소비/ 비상금 그 용도가 섞이지 않도록 통장을 나누듯, 계정을 나누는 것이다. 이건 성격인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섞여있는 걸 잘 못 봐서 테트리스 하듯 딱 딱 맞게 나누고 끼워 넣는 걸 좋아한다. 그리고 내가 쓴 글, 그림 같은 걸 내 친구들한테 보여주는 게 부끄럽기도 하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들이 마음 편하다.(모르는 사람이 많지도 않으니, 사실 혼자 보는 것에 가깝다.)
계정을 나누면, 계정에 따라 다른 내가 되는 기분이다. 계정을 정하는 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린다. 이름이든 계정이든 한 번 정하면, 바꾸는 것이 쉽지 않다. 그리고 한번 정하면 다른 것이 생각이 잘 안난다. 다른 곳에도 비슷하거나 같은 계정을 계속 쓰게 된다. 지금 내가 가장 많이 쓰는 아이디는 고등학교때 과외선생님이 정해 준 것이다. 그런데 웃긴 건, 이 아이디는 선생님이 내 이름에서 따온 것이고 내가 정한 다른 SNS계정 역시 보통 내 이름에서 조금씩 변형해서 만들었다. 그러고 보면 이름이 뭐 별 거인가 싶다가도, 별거인 것 같다.
내 이름은, 할아버지가 작명소에서 내 출생 일시를 넣고 돈을 주고 지어오셨다고 들었다. 만약, 할아버지가 다른 이름을 지어왔다면 나는 뭐라고 불리고 있었을까?! 나는 내 계정을 뭐라고 지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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